2013년 1월 26일 토요일

교육-에서 비속어로 주제 바뀜

 이제부터는 글을 쓰는데 비속어를 아끼지 않겠다.
비속어는 의미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서 필수다. 생각해봐라.
"시발, 너 나쁜놈이네" 이거랑 "너 나쁜놈이네" 이거 의미 전달+배경이 되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잖아.
원래 시발은 '졸라 창녀' 이런 뜻이라 졸라 엿같은 뜻이고, 그 본 뜻을 생각하면 전혀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실제 그런 의도를 갖고 시발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발이라는 말은 미국의 화씨나 lb같은 거다.
화씨는 상당히 괴랄(괴상악랄지랄등 여기 또 지랄이라는 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맞은 단위다. 십진법을 주로 쓰는 인간들이 왜 그걸 백등분하든지 천등분하든지 만등분을 하든지 하면 될 걸 왜 백팔십등분을 하고 지랄맞은 짓을 하는거야?(물 어는 온도부터 물 끓는 온도의 구간을) 게다가 화씨 0도는 물 어는 온도도 아니다 ㅋㅋ
그 연유가 파렌하이트의 체온이 가장 높을 때, 소금물이 얼 때를 기준으로 했기때문이라니 이해가 가기는 하는데, 체온이 가장 높을 때와 소금물이 얼 때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런걸까.. 체액의 농도와 바다의 소금물가 다른데 말이다.
갑자기 이상하게 딴 곳으로 새긴 했는데 딴대로 샜다 표현해도 이건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아니, 그냥 딴데로 샌 게 아니라 이걸 그냥 주제로 삼지 뭐.
그러니까 뜻이 엿같은 비속어를 쓰는 이유는 화씨랑 비슷하다.
비속어는 본 뜻이 엿같고 화씨는 만들어진 배경이 괴랄맞아 별로 좋지 않다.
그런데 이걸 계속 쓰는 이유는 '익숙해서'다.
익숙해지면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체화가 된다.
물론 본 뜻이 가지는 비중같은 걸 중요점으로 해석하면 별 공통점이 없겠으나
이미 쓰던거라서 계속 써야된다, 그래서 우린 그걸 써야된다. 이런 공통점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거다.
졸라 비효율적이고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진입 장벽이 되는 존재이기때문에 심도있는 연구를 통해 새롭게 유기적으로 조직하면 훨 좋겠으나 그런 움직임은 없는 거 같다.
애초에 자연적으로 생겨난거니 어쩔 수 없나? 언어에서 말야.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dark forest..

 주절대는 건 싫어하는데.. 그냥 써보고 싶어서 쓴다.
난 좀비물을 좋아하는데 좀비 좀비 zombie 영화가 좋아하는데
한국 좀비 영화가 궁금해진거야. 그래서 알아봤더니 좀 있긴 있더라..
예전에 이웃집좀비 말곤 한국 좀비영화 본 적이 없었는데 ㅎㅎ

어느날 갑자기 시리즈는 다 읽어봤던 건데 영화화되어있었고 4번째 이야기는 좀비물.
봤더니 아쉽다. 아쉽다. 아쉽다..
정통 좀비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너무 짬뽕이잖아.. 흐
바이러스나 세균 등의 좀비화의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원인 없음-괜찮음
돌탑 작은 돌 떨어지는 게 그렇게 위험한 일이냐 ㅋㅋ
그건 괜찮은데 갑자기 어딘가로 끌려간다는 듯 한 미신적인 느낌.. 좀 이상함.
차라리 정신이 나가서 혼자 막 뛰쳐나간다든지 환영이 보인다든지 하는게 더 났다.

그리고 왜 이 영화에서는 좀비되었을 때 개개인의 편차가 왜이렇게 큰 지..
어떤 좀비는 날래날래 칼지니고 쏘다니고
어떤 좀비는 그냥 밀기와 서있기밖에 하는게 없고.. 시범으로 죽어주는건지..
아무래도 영화상 처음 등장인물에게 인식되는 좀비는 갑자기 나와서 위기상황을 연출해줘야 보는 즐거움이 있지 않나..
남주는 왤케 병맛이지.. 조력자역할을 해주는 던전 경험인을 한 대 쳐서 좀비로 만들어죽이고 ㅋㅋㅋ 좀비물에서는 조력자가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고 회상씬 보여주고 밀리터리 택티컬 생존 뭐 그런 걸 조악하게라도 보여주면 좋은데.. 그런 것도 없이 죽었다.
생존자가 가족 좀비 죽이는 씬에서 좀비 3명끼리 왜이렇게 붙어있는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어색했다.
혼자 나가서 행동하는 장면은 전형적이긴 한데 그럴듯한 이유가 없다..
사람 찾으려면 낮에 가야지..왜 밤에 가냐고
아 글고 여주랑 남주 동생이 숨바꼭질 하는거 너무 ㅋㅋㅋ 솔직히 보다 웃었다.
효과음은 왜이리 비장한지..

차라리 등장인물간의 갈등상황을 좀 더 부각했으면 좋았을텐데..
형제라는 관계도 있고 아무튼 꽤 좋을 거 같은데.. 좀 인간스러운거 있잖아.

그리고 그 처음 좀비된 남자가 여자 죽일 때 왜 거길 그렇게 찔러대는거야;;; 왜..
데드스페이스 애프터매스 따라하는건가?
좀비가 여주 입벌리고 침 넣는건지 바닥에 흘리는건지 이 영화 사심으로 만든거 아냐?

소이현 연기 빼고는 왜 죄다 일본 특촬 슬래셔 배우를 보는 기분이 들고
좀비 소리도 그 생존자 아저씨 빼고는 별로인듯..
아 그 좀비 생존자 아저씨 피나서 당황하는 연기가 좋았던 거 같다.

하긴 좀비가 3마리밖에 없는데 뭐..
형이 동생 죽일 때도 좀 욕을 날려라..남매라면 모를까 고추끼리 그런 상황에 몰리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부자연스럽다. 나도 욕 안쓰니까 부자연스럽나./

시발 나도 각본이나 써볼까?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시사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듣고 코가 있으면 맡고.. 아무튼 스스로 활용해라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용당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는 시간이 가장 가치있는 재화다.
이용당한다는 건 너의 시간을 너 스스로 원하는 곳에 쓸 수 없다는 거다. 그것이 어떤 배움이던 즐거움이던 말이다.
 왜 그럴까. 당연하다. 독과점 때문이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언제나, 네가 했던 거보다 더 나은 선택이 존재한다. 뭔지 모를 뿐이다.

비슷함

 하. 역시 돌아갈 수 없다. 시간을 써도.
시간처럼 돌아갈 수 없다. 지식인가?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유형

 짜증나는 유형, 그러니까 보고싶지 않은 스토리의 유형이 그거다.
여자주인공이 강간당한다는 내용을 넣은 컨텐츠는 짜증이 난다.
그게 무슨 문화고 삶이냐. 자극적일 뿐이다.
그냥 내가 그런 걸 떠올리는 게 싫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그런 내용을 자주 쓴다는 게 짜증이 난다.
그딴 내용이 실제로 사회 속에 있다는 것도 짜증이 나고.
그냥 짜증나게 하는 덩어리다.
집단폭력이라는 건 정말 엿같다.
중범죄는 직접 손가락 한마디 자르는 야쿠자식 사과를 해야된다.
수지접합은 벌금에 포함시키고, 그럼 관련 분야 의사도 좀 더 늘어나고.
초범이나 재범이나 범죄를 막는 건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무슨 벌을 받을지, 무슨 벌을 받았나 그 감각을 망각할 수 없게 해야한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이러면서 그 상황에서 만족을 찾는 내용이 있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범죄는 스스로 죽지 않는다.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나태와 전쟁

 둘은 공통점을 가졌다.
망각이 원인이라는 것인데, 무엇을 망각하는가.
아마 어떠한 현상 그 전부일 것이다.
제일 먼저 감정이, 마지막으로 논리가 잊혀지지 않는가 싶다.
녹이 스는 것처럼.
감정의 노화와 망각을 막는 방법은 없나
다시 새롭게 백지화되어야 하나
그럼 완성될 수 없는 바벨탑과 같다.
아마 고통은 보호해 줄 것이다.
마치 백신처럼 말이다.
철학은 생활 그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라나 있었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시유

이 포스트는 개인적인 주관만을 담은 것이다.

 시유가 출시되고 그것이 TV에 방영된 적이 있다. 여러번.
그 배경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유명세를 얻기 위함인가?
캐릭터 문화와 아이돌 문화는 10대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다.
다만 보컬로이드는 좀 다르다.
보컬로이드의 특징은 연쇄적 창조에 있다.
캐릭터 문화가 가진 광범위하고 높은 접근성으로부터 나온 창조적인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
캐릭터화된 음성을 기반으로 청각 컨텐츠가 창작되며 새로운 창작의 뿌리를 만든 것이다.
즉 공급자가 발을 붙일 수 있는 분야가 넓어진 것이다.
공급의 확장뿐만 아니라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질의 상승으로도 이어졌다. 컨텐츠가 캐릭터에게 주는 영향도 강해졌다. 기존의 시각 위주의 그림, 영상을 벗어나 IT세대가 접할 수 있는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캐릭터화된 컨텐츠로 자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이성으로 인해 비영리적 컨텐츠 공급자들은 어느정도의 수준을 갖추어야만 하는 공급에서의 접근성은 좀 높아지긴 했으나 오히려 수요가 점차 늘어나자 개인적 만족을 얻고자 하는 공급자에게 컨텐츠 제작은 긍정적 도전이 되었다.
그렇게 나와 많은 수요자들에게 선별된 컨텐츠들은 어느정도의 수준을 갖게 됬고, 그것을 축으로 하여 새로운 컨텐츠가 파생되어 창작된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여기까지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최소 2년은 된다.
그것은 기존 공급자들의 실력향상이나 수요자들이 공급자로 활동하기 위해 배우는 시간을 포함한다.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나는 왜 누구는 램과 시유의 TV동시출현이라는 선택을 여러 번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단지 유명세를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다.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GLAM이라는 걸그룹의 이미지를 잃는 것이 첫 손해다.
SeeU를 포함한 보컬로이드 문화는 캐릭터 문화에서 상당히 큰 편에 속하지만 애초에 캐릭터 문화를 지지하는 사람은 다수파가 아니다. 게다가 아이돌 문화에서 큰 구매력(재원이 풍부하던 풍부하지 않던 말이다)을 가진 10대 여성에게 캐릭터 문화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이돌 문화에서 활동할 글램은 타격을 받는 것이다.
둘째로는 SeeU를 모르고, 그 컨텐츠를 소비하지 않는 사람이 SeeU를 검색하거나 이야깃거리로 하는 경우는 많겠지만, 그것은 이 문화의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곡을 만들면, 보컬에게 맡기거나 자신이 부르면 된다.
그것은 영리를 위한 주류에 탑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유에게 곡을 주는 사람이 영리적인 목적을 가졌을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앨범 판매등의 부가적인 수입을 기대할 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시유는 한국에서 주류가 아니라 음원 수입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
그럼 곡을 왜 주는가?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다. 그 만족이 명예에 있던 그냥 자신이 만든 노래가 전파되는 것에 있건, 시유에게 곡을 주는 개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곡을 주는 거다.
SBS라는 기업이 (언론으로서가 아니라) 시유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려면 그 기업이 작곡가를 고용하든지 아니면 비영리적 자발적 공급자를 끌어와서 문화를 확장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작곡가를 고용하려면 그건 적자다. 기업이 자원봉사하는 격이다.
그럼 당연히 자발적인 작곡가가 공급해주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 만족할 정도가 안 되면 홍보를 해야 한다.
홍보는 다른 작곡가의 곡이 유명해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일텐데, 그것이 원하는 만큼이 안되니까 SBS차원에서 방송에 내보낸 것인가 싶다.
그러나 방송에서 나왔던 곡은 애초에 시유의 곡도 아니었기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부적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왜 글램과 시유가 동시 TV출연을 했는지 모르겠다.

혹은 딜레마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업이 계획했던 만큼 진행이 좋지 않자 돌파구로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해봐도 저것을 해봐도 맘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오니까 말이다.
그것은 일본과 한국의 10대들의 차이점(정확히는 교육)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기초적인 창조를 위한 기술을 갖췄으나 그렇지 못했느냐의 차이다.

캐릭터 문화

 캐릭터 문화는 아쉽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조성을 갖고 있고 접근성이 높은 것이 그 원동력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패하기 쉽다. 포장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일, 이것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보다 완전한 새로운 형태의 인격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일상이 될 것이다. 하루의 모든 시간에서.
그것은 경쟁의 본질 때문이다.
수요가 공급을 만족시키고 남을 정도이고 그 구조가 독과점으로부터 안정되어있으면, 경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곧 새로운 도덕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21세기 독과점으로 인한 부패된 기준은 버려질 것이다.

전쟁같은 꿈을 꿨다.

 전쟁은 아닌 전쟁같은 꿈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배경은 내가 잘 모르는 학교였다.
나는 군복이 아니라 사복을 입고 있었다. 나랑 다른 한 명이 걷고있었다.
총성이 들렸고 내 옆에 있던 이가 죽은 것을 봤고 적에게 응사하다 탄창을 다 써버렸다.
그 때 다수의 적이 이 쪽을 향해 사격하는데 엄폐물에 맞는 총알 소리, 머리 위로 핑 핑 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나는 장전이 끝나고 구름다리같은 곳을 통해 달리며 뒤를 향해 쐈다. 총알이 가깝게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들고 있던 총은 아마 AK-47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다리를 통과해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쫓아오는 적들에게 응사했다. 보이는 건 2명 정도였다. 가늠좌와 가늠쇠를 보고 정확히 조준했는데, 그렇게 쏘아도 3발 중 2발은 빗나갔다. 50m 정도의 거리였던 것 같다.
 그러다 한 명을 2발인가 3발인가 맞췄고 그가 쓰러지자 그의 동료가 날 추적하는 걸 멈췄다.
나는 계속 후퇴, 아니 도망가면서 총을 쐈는데, 그 때 10발 정도 쐈으나 맞히지 못했다.
그렇게 달리다가 깬 것 같다.

 전쟁은 두려운 것이다. 아픈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위하여 그것은 우리의 기억에 상주해야 한다.
망각은 약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옳지는 않다.